'세계 7위 해운사'였지만, 경영난 버티지 못하고 침몰

2017년 2월 17일, 한진해운이 파산을 선고받고 해운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40년 전, '수송보국(輸送報國)'의 기치를 내걸고 국내 해운산업에 뛰어든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의 꿈도 무너졌다. 조 회장은 육(한진), 해(한진해운), 공(대한항공)에 걸쳐 수출입물품을 수송하며 대한민국이 무역강국으로 올라서는데 큰 기여를 해 왔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때문에 한진해운의 파산은 대한민국 해운역사의 아픔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이에 본지는 지난 40년 한진해운의 역사를 되짚어 본다.<편집자 주>

 

[데일리로그 = 김수란 기자] 1967년 수송보국의 일념으로 한진그룹 창업주인 故조중훈 회장은 한진해운 전신인 대진해운을 설립했다. 조 회장은 1945년 인천에서 트럭 한 대로 한진상사를 열고 수송사업에 뛰어들었고 그의 수송 중심에는 한진해운이 함께 했다.

그는 베트남 전쟁에서 물류사업을 하던 중 해운업에 매력을 느끼고 대진해운을 세우고, 1972년에는 컨테이너선인 인왕호를 한일항로에 투입해 국내 첫 컨테이너선사로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이듬해 1차 오일쇼크로 회사는 문을 닫았지만, 조 회장은 해운업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1977년 다시 한진해운을 설립해 '해운왕'의 꿈에 재도전했다.

이후 1988년 국내 해운산업 합리화로 경영난에 빠진 대한선주를 강제로 떠안기도 했으나, 우량기업으로 탈바꿈 시켜 1992년 국적선사 최초 매출 1조 원을 돌파했다.

또 1995년에는 포스코 자회사인 거양해운을 인수해 벌크 장기 전용선 부문에서도 몸집을 키우고 1997년에는 독일 2위선사인 DSR-세내토(senator)를 인수해 글로벌 부문에서도 덩치를 불렸다. 2002년 조 창업주 타계 후에는 3남인 故 조수호 회장이 한진해운을 독자경영했다.

한진그룹에 있으면서 별도로 조수호 회장이 독자경영을 했던 시기를 최대 황금기로 꼽았다. 한진해운 주도로 글로벌 얼라이언스인 CKYH를 출범시키고 해운업 호황이던 2000년대 중반까지 5,700TEU급 컨테이너선을 연달아 인수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조수호 회장이 지병으로 별세하고 이듬해 부인인 최은영 회장이 경영일선에 나서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해운시황의 최고점을 찍어가던 시기에 회사를 떠맡으면서도 한진해운의 법정관리 원인이 됐던 고가의 용선계약과 무분별한 선박발주로 인한 거액의 금융이자가 이시기에 형성됐기 때문이다. 또 ‘감성경영’을 외치면서 전문경영인 체제를 주장했던 외부 모습과 달리 회사 경영에 개입하고 한진그룹에 넘기기 직전에는 회장 직속 혁신팀까지 만들기도 했었다.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발발한 해운위기에도 능숙하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평이다. 해운위기로 회사가 어려워졌음에도 그룹과 계열분리를 하겠다며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과 사사건건 부딪혔다. 한진해운이 어려워졌음에도 계열분리 명목으로 기존 한진해운을 물적분할해 한진해운홀딩스(현 유수홀딩스)를 출범시킨 것.

거기다 2010년 반짝 시황 상승을 두고 막연하게 낙관적으로 미래를 예측하면서 신설 법인이 된 한진해운이 법인세 대신 톤세제를 신청해 거액의 적자에도 세금을 납부하고 주력이 컨테이너 선사임에도 화주계약도 체결안된 스팟용 벌크선을 대거 발주해놓으면서 무리하게 금융계약을 맺기도 했다.

이처럼 막연하게 긍정적인(?) 시황예측은 결국 콧대높은 최은영 회장을 꺽었다. 2013년 3년 연속 적자로 채권단인 산업은행의 압박에 못이겨 대한항공에 긴급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이후 조양호 회장은 2014년 한진해운 경영권을 인수키로 했고 최은영 회장은 한진해운홀딩스, 사이버로지텍, 한진SM(유수SM)과 해외 물류계열사 6~7곳을 가져가는 선에서 정리했다.

하지만 개선되지 않은 해운시황과 지속적인 산업은행의 압박으로 조양호 회장 손에 넘어간 한진해운의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산업은행은 높은 부채비율을 이유로 자구책을 내놓으라고 압박하면서 한진해운은 회사가 어려울 때도 돈을 벌어다 준 벌크전용선대, LNG선대, 국내 터미널 등 알짜자산들을 매각하게 된다. 특히 자산 매각과정에서 여러 독소조항을 집어넣으면서 부산신항의 한진터미널이 피해를 입는 상황도 벌어지기도 했다.

자산을 매각한 자금이 들어오면서 일시적으로 한진해운은 흑자로 전환했으나, 컨테이너시황이 나아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나마 돈을 벌어다 줬던 선대와 터미널 등을 매각해버린탓에 흑자는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지난해 4월 25일 한진해운은 채권단과 자율협약을 체결하고 채권단은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을 저울질하면서 양측을 압박하기도 했다.

특히, 채권단이 내건 자율협약 조건에서 용선료협상과 얼라이언스 가입 등을 이행하고 선박금융 상황 유예와 이자율을 낮추기 위한 협상도 진행 중이었음에도 채권단은 8월 30일 자금 지원을 중단한다고 발표했고 9월 1일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공교롭게 조양호 회장이 한진해운을 채권단에 맡긴 뒤 평창동계올림픽위원장에서 사퇴하고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면서 청문회까지 여는 등 최순실 의혹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최순실이 출연한 2개의 재단 중 1곳에만 자금을 출연해 비선실세인 최순실 씨의 눈밖에 나며서 한진해운도 같이 날렸다는 것.

거기다 당시 채권단이 현대상선 상황이 한진해운보다 안좋았음에도 한진해운에만 유독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댄 것에 대한 의혹이 말끔하게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최순실 국정농단에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연결 의혹까지 겹치면서 의혹은 계속 커지는 중이다.

법정관리 개시 이후 상황은 급속하게 나빠졌다. 법정관리 개시 2주차인 추석 전까지만 정부의지만 있다면 살아날 수 있으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으나,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기업의 도덕적 해이 문제로 한진해운을 거론하면서 희망은 사라졋다.

결국 선박가압류 등으로 영업망은 무너지고 곳곳에 한진해운의 화주들이 실은 짐들이 묶이면서 물류대란이 촉발했다. 정부는 긴급대책으로 부산항에 한진해운 선박을 불러모아 일시에 짐을 내리라는 다소 무식한(?) 정책을 내놓으면서 부산신항이 한진해운 선박으로 마비가 오고 터미널에서는 갈 곳없는 한진해운의 공컨테이너가 쌓여 장치율이 80~90%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법정관리 이후 법원은 한진해운의 핵심 자산인 미주와 아시아 노선을 분할매각키로 결정했고 대한해운이 낙찰받아 SM상선을 출범시키기도 했다. 또 한진해운이 가지고 있던 해외 주요 터미널들은 대부분 현대상선이 인수하게 됐다. 대부분의 자산을 매각한 한진해운은 이달초 회생절차 폐지를 결정하고 17일 공식적으로 파산을 선고받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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