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로그 = 양종서 객원논설위원 · 한국수출입은행 연구위원] 우리 조선산업을 위협하고 있는 중국이 따라오지 못하는 결정적 요인이 하나 있다. 기자재산업이다. 조선산업은 설비투자하고 국영해운업체를 압박해서 선박을 발주하도록 하고 국영은행들로 해 금융을 지원하도록 하면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또 지구상에서 그러한 일이 가능한 나라도 중국뿐이다. 오로지 국가의 힘만으로도 생산량에서는 한국을 능가하는 1위 국가가 됐다. 그런데 쉽지 않은 것은 기자재산업인 것 같다.

기자재산업은 조선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워낙 종류도 다양하고 기초적인 기술력이 하나하나 뒷받침돼야 하는 탓에 자본의 투입이나 국가의 힘으로도 단시간 내에 어쩌지 못하는 특성이 있다.

중국에 비해 상당한 우위를 가지고 있는 국내의 기자재산업은 1980년대의 집중 육성 정책을 통해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기초가 갖춰진 이후 1990년대에 비교적 경쟁력 있는 기반을 다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대적인 조선산업이 시작된 직후 우리 정부도 기자재의 지원없이 조선산업이 경쟁력을 갖춘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가졌던 것이다. 정부의 정책과 민간의 노력이 결실을 거둬 기자재산업은 오늘날 세계 제1의 조선산업 경쟁력을 갖추는데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됐다.

최근 불황의 여파로 기자재 업계도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조선소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규모가 작은 기자재업체들의 어려움은 더 큰 것으로 보인다. 불황으로 일감 자체가 줄어들었고 선가하락의 영향으로 인해 조선소로부터 단가 인하압력을 더 거세게 받고 있는 듯하다.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기업인 조선소가 조금 더 책임감을 가지고 파트너 정신을 발휘할 부분은 없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블록업계의 예를 보면 호황기에 정신없이 밀려드는 일감으로 설비 증설 등 투자를 확대했으나 갑자기 닥쳐온 불황으로 일감이 크게 줄면서 극도의 어려움에 빠졌다. 불황의 여파가 블록업계에만 있는 것은 아니나, 불황 이후 조선소들이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블록의 비중이 늘어나면서 블록업계의 물량 감소는 체감하는 것보다 더욱 혹독했을 것이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으나 상당수의 블록업체가 도산했거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누구를 탓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조선소의 경영자들도 가동률을 극대화해 불황기의 실적감소를 최소화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소한 영업이익이 마이너스가 아닌 상황이었다면 기자재 업계에 대한 배려가 조금 더 필요하지 않았는지 돌아볼 필요는 있을 듯하다.

최근 국제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평형수(ballast water) 규제에 있어서 우리나라 기자재 업계의 대응이 돋보이고 있다. 향후 80조 원 시장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정부에서도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대책이 구상되고 있다. 몇몇 중소 기자재기업의 노력이 결실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세계 조선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국내 초대형 조선소 일부도 이 시장에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일부 조선소들이 자체적인 기술개발을 통해 IMO의 최종심사를 통과한 소식이 보도된 바 있다.

평형수 규제에 대비해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적극 대응하기 위한 차원이라는 점에서 대형 조선소들의 행보를 비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소들이 중소 기자재업계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면 이를 직접 개발하기 보다는 중소업계로 시장을 넘기고 대외적으로 표준화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대형 조선소들은 평형수 이외에도 연비향상 등 경쟁력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기술개발에 투자할 곳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중국 조선소들의 경우 기자재의 품질도 떨어지지만 업체가 지리적으로도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지 않아 기자재로 인해 며칠씩 조업 차질을 빚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이에 반해 양질의 제품을 공급하면서도 부산, 경남, 목포 등 조선소와도 가까운 곳에 집중적으로 발달해 기동성 있는 지원을 하고 있는 우리 기자재산업이 조선산업의 강력한 경쟁 무기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조선소만의 수익을 극대화하기 보다는 보다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기자재업계와 동반 성장하는 전략이 필요할 때이다. 특히 이러한 불황 국면에서 서로의 신뢰와 양보를 기반으로 한 동반의 문화가 형성된다면 이 부분도 우리 조선산업 전체의 저력으로 축적되어 갈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문화가 최근 대선에서 강조되고 있는 경제민주화 중 일부가 될 수도 있다.

기자재 산업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한국은행의 한 보고서에 의하면 기자재의 국산화율은 약 64%에 불과하다고 한다. 더욱이 우리 조선업계가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노력하고 있는 해양부문의 기자재 국산화율은 20%에 불과하다고 한다. 일부 고가의 기자재는 아직도 선주들의 신뢰를 얻지 못해 탑재율이 미진한 형편이다.

조선업계가 갑이라는 의식을 버리고 파트너라는 의식을 가짐으로써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상생! 그것은 위기를 극복하고 우리 조선업계가 세계 시장의 주도권을 영원히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이 될 것이다.

* 본고는 필자의 개인적 견해일 뿐 필자가 소속된 기관의 공식 입장과는 무관함을 밝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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