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경력 김영수 씨 “마지막 희망 꺾이면 어떡하죠”

- IMF로 직장 잃고 택배업 첫 발

[데일리로그 = 오병근 기자] “택배가 생긴 지 수 십 년이 흘렀는데, 왜 이제 와서 그러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우리같이 불쌍한 사람들 먹고 살 수 있게끔 그냥 좀 내버려 두면 안 된답니까.”

역대 유례없이 치열하게 치러졌던 18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다음 날인 20일 점심시간. 경기도 의왕시 대로변에 위치한 한 식당에서 택배기사 김영수(가명, 46세) 씨를 만났다. 김 씨가 너무 바빠 인터뷰 일자를 세 번이나 바꾼 후에서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김 씨는 A택배사에서만 5년째, 32살부터 15년째 택배 일을 하고 있다. 김 씨는 ‘신용불량자’에다 자가용차량을 운행하지만, 택배를 배송하는 것이 천직이라 믿고 하루 15시간씩 운전대를 잡아왔다. 열심히 살다보니 만신창이가 된 그의 삶에도 한 줄기 빛이 들어왔다. 지난 2월 대구 아가씨와 결혼을 했고, 지난달 23일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을 얻었다. 김 씨는 퇴근 후 아이를 본다는 생각에 배달업무가 고되지만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하다. 그의 인생 46년 만에 처음 찾아온 믿을 수 없는 행복이다. 그런데 어쩌면 내년부터 택배 일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김 씨의 마음 한 구석에 그늘이 드리워지고 있다.

- IMF로 직장 잃고 택배업 첫 발

김영수 씨는 다리가 불편하다. 선천성 소아마비로 태어나 오른쪽 다리가 왼쪽보다 1cm 정도 짧다. 그래서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큰 힘을 쓸 수 없기 때문에 머리를 써서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을 찾기 위해서다. 1986년 대학에 입학하고, 1990년도에 졸업한 후 곧바로 한 직업훈련소의 교사로 사회에 첫 발을 대디뎠다.

직훈 교사라는 직업은 김 씨에게는 꽤나 괜찮았다. 안정적이었고 금전적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신용카드가 5개나 있었다. 술이 먹고 싶으면 먹었고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가졌다고 한다. 이후 대기업인 L음료로 이직해 2년간 전산교육을 담당했다. 김 씨의 인생은 서울에 사는 대다수 샐러리맨과 비슷한 인생이 펼쳐지는 듯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7, 8년 간 남부러울 것이 없었어요. 그냥 보통 사람들처럼 꽤 괜찮은 직장을 다니며 하루하루를 살았죠. 그런데, IMF가 터지면서 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죠.”

1997년 12월. 우리나라를 휩쓸었던 IMF라는 차가운 현실은 김 씨의 삶을 순식간에 바꿔놓았다.

그는 직훈에서 근무할 때, 같이 근무하던 학교선배가 사업을 한다면서 돈을 빌려달라고 해 3~4개의 신용카드에서 현금서비스를 받아 선배에게 줬다. 하지만, 믿었던 선배의 사업이 잘 안 되자 본인이 카드빚을 갚아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워낙 친했던 선배였는데, 사회 초년병이 무슨 돈이 있었겠어요. 할 수 없이 카드를 긁어 돈을 융통해 줬는데, 그게 제 인생에서 발목을 잡을 줄 몰랐어요.”

김 씨는 L사로 이직했지만, 카드빚을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그나마 회사를 다닐 때는 월급에서 70만 원을 제외한 나머지 돈이 압류가 됐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IMF까지 터져 회사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김영수 씨 인생은 180도 바뀌었다. 안정된 직장에 다니며 결혼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반적인 삶’은 더 이상 김 씨의 것이 아니었다.

L사에서 받은 퇴직금 등으로 카드빚은 다 갚았지만, 김 씨를 채용하는 회사는 없었다고 한다.

“신불자 이력이 전산에 남아있기 때문에 제가 가진 능력만으로 직장을 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집 앞에 놓인 무가정보지에서 택배사 직원모집 광고를 보게 된 것이 이 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김 씨는 당시 한 중앙일간지에서 운영하던 F사의 택배기사로 취업했다. 회사에서 요구했던 것은 1t 화물차를 가지고 들어와야만 한다는 조건이었다. 금융기관에서는 신불자 경력이 있는 그에게 대출을 해 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대부업체인 S사에서 자금을 융통해 차량을 구입한 후 취업을 했다. 하지만, 몸이 불편한데다 처음 해 보는 일이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잘 안됐다. 차일피일 미뤄왔지만 결국 빌린 돈을 갚지 못해 7~8년 전 두 번째로 신불자가 됐다.

“신불자가 되면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어요. 지금도 신불자 생활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나마 택배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먹고 살 수 있는 거죠.”

- “그냥 좀 내버려두면 안 된답니까”

- 아침 점심 굶고 일하지만 가족 생각에 버텨

김 씨는 하루 15시간을 일한다. 오전 7시까지 의왕에 위치한 회사에 출근해 그날 배달할 물량을 차량에 싣고, 과천, 안양, 청계 등 그가 담당하고 있는 지역을 쉴 새 없이 이동하며 물건을 배달한다. 물건 배달이 끝나면 오후 6시나 7시부터 거래처 및 각 가정에서 집하를 한 후 회사로 돌아온다. 물량을 회사 물류센터에 입고하면 저녁 9시. 김 씨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이렇게 한 달을 버티면 그에게는 300~350만 원 가량이 들어온다. 차량 기름 값 80만 원을 빼면 220~270만 원, 여기에 보험료와 불법주정차 스티커비용, 차량수리비 등등의 비용이 추가로 지불되는 달에는 200만 원이 채 안 되는 돈을 가져간다고 한다. 노동력에 비해 수입은 턱없이 적은 것이다.

김 씨는 몸무게가 52kg이다. 키가 160cm로 조금 작은 편이지만, 택배 일을 하기 전에는 70kg을 넘었다고 한다.

“택배일을 하자마자 2~3주 정도 지나니까 20kg이 빠지더라구요. 처음에는 무슨 병에 걸리지 않았나 의심했을 정도라니까요.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니까 살이 빠질 수밖에 없더라구요. 그만큼 택배일이 고되요. 오죽하면 택배가 대표적 3D업종이라는 말이 나오겠어요.”

김 씨는 하루 한 끼만 먹는다. 아침은 커녕 점심도 먹지 않는다고 한다. 아침은 일찍 나와야 하기 때문에 먹지 못하고, 점심은 돈이 아까운데다 먹을 시간도 없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하루 한 끼가 너무 당연하다고 한다.

“아마 택배 일을 하는 사람은 알 겁니다.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저녁만 먹어요. 그게 뭐 이상한가요. 그래도 저는 신혼이라 그런지 저녁에는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어 행복해요. 작년까지만 해도 저녁도 입맛이 없어 제대로 먹지 않았거든요. 결혼해서 4kg이나 늘었다니까요.”

김영수 씨는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46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아내와 자식이 생겼기 때문이다. 자신이 돌볼 수 있는 가정을 꾸리고 하루하루 생활할 수 있는 현재가 그에게는 낙원이고 천국이다.

“아들이 오는 토요일이면 딱 한 달이 되는데(인터뷰는 20일 목요일 이뤄졌음), 많이 아파서 걱정이에요. 병원에 가보니 갓난아기들은 대부분 그렇다고 하네요. 아휴, 그 놈이 아프지만 말고 건강하게 잘 자랐으면 하는데….”

인터뷰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지켜보던 지사장(영업소장) 임동훈(가명) 씨가 한 마디 거든다. “얘는 결혼하기 전에는 어떻게 하면 집에 늦게 들어갈 궁리만 했어요. 집에 들어가봐야 아무도 없으니, 갈 마음이 생기겠어요. 그런데 장가를 가고 아이까지 생겼으니 오죽하겠어요. 요즘에는 빨리 들어가려고 안달이에요.”

아이 얘기가 나오니 김 씨의 얼굴에 웃음기가 번졌다. 식사를 제때 하지 못해 앙상한 얼굴 속에 감춰진 김씨의 하얀 이가 보였다. 늦둥이를 본 아빠의 마음은 어쩔 수 없는 듯 보였다.

“제 삶이 바뀌었어요. 빨리 집에 들어가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일도 신이 나는데, 한편으로는 걱정도 돼요. 좀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죠. 아무래도 입이 하나 더 늘었잖아요.”

- “그냥 좀 내버려두면 안 된답니까”

그의 말대로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하지만, 김 씨를 둘러싼 주변여건은 녹록치 않다.

정부가 빠르면 내년 2월부터 자가용 택배차량에 대한 영업용 전환을 본격화 하지만, 아직까지 이들 신불자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대로 전환사업이 추진되면 김 씨는 택배시장에서 내몰리게 되고, 어렵사리 찾아온 행복은 지킬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물었다. 정부가 단속을 강화해 현재의 직장에서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면 어떻겠냐고.

“사실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인터뷰를 하는 지금도 피부로 와 닿지는 않아요. 실감이 안 납니다. 그런 일은 높은 분들(공무원, 기업체 사장)이 잘 협의하겠죠. 우리 일이 아니잖아요. 우리 같은 사람이 뭘 아나요. 설마 일을 못하게 하지는 않겠죠.”

김 씨의 이러한 답변에 답답했는지, 옆에 앉아있던 임 지사장이 한 마디 했다. “이 사람아 왜 우리 일이 아니야. 바로 당신 일이야. 왜 그걸 모르는지 답답해 죽겠네 정말.”


그랬다. 김 씨는 아직 자신의 앞 날에 어떤 현실이 닥칠지 예상하지 못한채, 설마 쫓겨나기야 하겠냐고 생각한 것이다. 아니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임 지사장은 말했다. “제가 9명을 데리고 일하는데, 그중 6명이 신불자입니다. 그런데, 얘네들이 그걸(신불자들에 대한 대책없이 사업용차량 전환이 이뤄지면 택배업을 할 수 없다는 것) 몰라요. 설사 그런 일이 있더라도 사장이나 고위 공무원들이 잘 해결할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안하고 있어요. 신불자들은 물론, 주변에서 택배일을 하고 있는 영업소 사장(소장)들도 소주 한 잔 하면서 얘기해보면 답은 똑 같아요. 설마 정부에서 그렇게까지 하겠냐는 거예요. 나만 답답해 미치겠는거죠.”

그제야 김 씨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가족 얘기를 하며 행복했던 표정이 조금은 어둡게 바뀌었다. “정말 그렇게 될 수도 있나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죠. 십 수 년 간 똑 같은 일을 해 왔는데, 이제 와서 몰아낸다면 나 같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라는 거죠. 또 우리 애기는 어떡해요.”

“젊은 사람들은 아직 괜찮을 겁니다. 힘 있고 젊은데 뭘 못하겠어요. 우리 같은 사람은 돈 몇 백만 원이 없어 자그마한 구멍가게도 차릴 수 없어요. 하물며, 지금 이 나이에 취직하려고 하면 업체에서 받아 주겠냐고요. 저 같은 사람은 죽으라는 얘기밖에 더 됩니까.”

이날 김 씨는 몸이 많이 아팠다. 감기에 걸려 온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런데도 출근했다. 그는 이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임 지사장에게 “오늘은 배달할 물량이 조금만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한다. 임 지사장이 몸이 많이 안 좋은 것 같으니 오늘 하루만이라도 쉬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고 한다.

“우리 같은 일 하는 사람들, 하루 쉬면 바로 그 여파가 옵니다. 남들은 징검다리 휴일이다, 명절연휴다 뭐다 해서 노는 날이 많으면 즐거워 하지만, 우리는 한 숨부터 나옵니다. 연휴가 싫은 거죠. 그러니 몸이 아파도 배달을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하루 이틀 쉬게 되면 벌이가 줄어들기 때문에 그 여파가 계속 이어 지거든요.”

이날 그는 60박스를 배달했다. 평소에 비해 3분의 1 수준이다. 그는 평상시 150박스를 배달한다고 한다. “사실 배달물량이 적다고 해서 집에 일찍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집하를 해야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거든요. 어떻게 보면 퇴근시간은 비슷하지만, 그래도 배달을 하는 중간중간에 조금씩 쉴 수 있기 때문에 오늘 같은 날 물량이 적으면 아무래도 좀 낫죠.”

김 씨는 얼마전 엉덩이가 심하게 불편해서 병원을 갔다고 한다. 병명은 ‘좌골신경통’. “노인성 질환이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아직 그렇게 늙지 않았는데, 아마 소아마비 걸린 다리가 1cm 짧은데다 무거운 물건을 매일 같이 들어 나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병이 걸렸나봐요. 직업병이죠 뭐.”

그는 경기도 수원에서 보증금 500만 원에 월 30만 원짜리 방을 얻어 생활하고 있다. 세 식구가 살기에는 조금 작지만 그럭저럭 생활할 만 하다고 한다.

“제가 안양에 살 때 신혼전세자금을 신청했었거든요. 이번에 그게 됐다고 연락이 왔어요. LH공사에서 7,000만 원을 빌려준다고 하는데, 갈 수가 없었어요. 전세자금을 받기 위해서는 350만 원을 먼저 내야 한다는데 그걸 낼 형편이 못되거든요. 그래서 그냥 여기서 살기로 했어요.”

사업용 차량 전환사업이 본격화 되고, 카파라치제가 본격 도입되면 어떻게 하겠냐고 물었다.

“제가 일을 못하게 되는 상황에서 카파라치제가 도입되면 저도 아주 싼 카메라 한 대 구입해서 찍으러 다녀야죠.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어요. 아들이 갓 태어났는데 뭐라도 해서 먹여는 살려야죠. 하지만, 정말 (택배 일을)못하게 된다면 우리 세 식구는 지금보다 훨씬 힘들어 질텐데…”

김 씨는 그냥 느지막이 찾아온 이 행복이 깨지지만 않길 바라고 있다. 막다른 골목 끝에서 찾은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김 씨는 “택배란게 솔직히 일이 힘들어서 그렇지, 열심히만 하면 먹고 살 수 있어요. 저 같이 밑천도 없는 신불자들이 어디 가서 이만한 돈을 벌 수 있겠어요. 우리같은 사람들한테는 이게 마지막입니다. 몸이 좀 아프고 피곤해도 가족 생각하면서 덤벼들고 있어요.”

그는 정부가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껴안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는 뭐가 어떻게 되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이 살 수는 있게 해주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무작정 길거리로 내몰면 어디로 가라는 것입니까. 정부가 사업용 차량을 줘서 우리같은 사람들에게 유류보조금을 준다면 더없이 감사한 일이지만, 그게 안된다면 그냥 이대로 먹고 살게 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냥 좀 내버려 두면 될 텐데, 그게 정말 그렇게 안 되는 일인가요.”

김 씨와의 1시간여 남짓한 인터뷰는 이렇게 끝났다. 김 씨의 15년 된 낡은 트럭에는 이날 오후에 배달할 물건 20여 개가 남아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김영수 씨는 남은 물품들을 다 배달하기 위해 나섰다.

현재 국내에서 운행되는 택배차량은 3만 5,000여 대이다. 이중 약 40%인 1만 5,000여 대가 자가용 차량이다. 이들 자가용차량을 운전하는 택배기사 가운데 40%가 신용불량자라고 한다.

국토해양부는 내년 1월 중순까지 택배사업자 인정 및 허가 대수를 확정하고, 빠르면 2월부터 사업용차량을 지급할 계획이다. 하지만, 국토부는 현재까지 신불자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새 대통령이 선출됨에 따라 내년부터는 새 정부가 들어선다. 국민들은 새 정부가 들어서면 희망을 걸게 된다. 신불자 택배기사들도 국민이다. 이들에게도 열심히 일하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이 있어야 한다.

한파가 몰아치고 있는 지금 이 시간에도 현장에서는 수많은 김영수 씨가 재기를 꿈꾸거나, 또는 가정을 지키려 굵은 땀방울을 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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