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로그 = 양종서 객원 논설위원, 現 한국수출입은행 연구위원]

조선업계 사람들이 사석에서 흔히 하는 얘기가 있다. 한국 조선산업이 세계 1위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정부가 조선산업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내버려두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정부에 대한 불만을 우회적으로 비아냥거리는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사실 한국 조선산업이 세계 최고가 된 것은 업계의 노력이 가장 큰 원동력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업계사람들의 말처럼 정부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사석의 농담이라 할지라도 우리 정부로서는 할 말이 많을 것 같다.

정부가 90년대 이후 OECD 협약 등으로 인해 조선산업에 대한 지원이 크게 줄어든 것은 사실이나 70~80년대에 시행한 정책은 많이 있으며 성과가 작지 않았다. 그 중 70년대에 시행된 계획조선 사업이 있었다. 현대중공업을 시작으로 국내 대형 조선소가 문을 열었던 70년대는 1차 오일쇼크 이후 시황이 매우 좋지 못했던 시기였다. 한국 조선산업은 태동과 동시에 큰 위기를 맞게 됐고 생존의 위협마저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정부가 내놓은 정책이 ‘계획조선’이었다.

계획조선은 해마다 국내 선주사들을 대상으로 선박건조 계획을 공모해 선정된 선박의 건조를 국내 조선소에서 담당하고 이에 대해 정부가 금융을 주선해주는 사업이었다. 계획조선으로 국내 조선소들은 불황기의 최소 일감을 확보함으로써 위기를 넘길 수 있었고 해운사들도 선대확장으로 시장 내에서 입지를 다질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해운과 조선산업의 불황기 전략으로서 매우 성공적인 정책이었다.

이러한 정책을 지금에 와서 다시 시행한다면 어떠할까? 고민할 필요도 없이 WTO, OECD 가이드라인 등 국제 통상규약에 위배된다. 더 이상은 펼 수 없는 정책이다. OECD 국가도 아니고, 힘을 바탕으로 국제통상 질서에도 아랑곳 하지 않는 중국에서나 가능한 정책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이러한 정책이 필요한 시기인 것으로 보인다. 해운업, 조선업이 동반 침체인 상황이다. 침체의 늪도 매우 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침체의 와중에 전 세계 해운, 조선시장은 그린쉽과 연비경쟁력이라는 이슈가 부각되고 있다. 세계 최상위 해운업체들은 최신 고효율선박 투자에 의한 효율화 경쟁으로 이익을 내고 있다. 당연히 국내 해운사들도 이 흐름에 따라야하고 최신선박에 투자해야 한다.

한국선주협회의 자료에 따르면, 국내 해운사의 선박 평균 선령은 약 14년으로 세계 평균치와 유사한 수준이다. 하지만 일본, 독일 등 주요 경쟁국가의 평균 선령이 10년 이내인 점을 고려하면 우리 해운선사들이 평균 수준에 안도하고 있을 수는 없다. 고효율 싸움에서 주요 경쟁국에 밀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우리도 새로운 투자를 계획해야 할 때이다.

그런데 문제는 국내 해운사들이 수년째 지속된 침체로 인해 투자여력이 없다는 점이다. 깊은 침체와 추가적인 투자 수요, 이것이 계획조선과 같은 정책이 절실한 이유인 것이다. 해운사뿐 아니라 해양부문 비중이 작은 국내 중견이하 조선소들의 경우, 일감 확보에 애를 먹고 있어 국내 해운사들의 신규 투자 물량이 활성화 된다면 위기극복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계획조선과 같은 직접적인 산업지원 정책은 통상마찰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제2의 계획조선 정책은 직접적인 산업 지원책보다 금융정책이 우선돼야 한다. 지금 시점에서 해운사들이 신규투자를 위해 필요한 것은 금융이며, 이것은 조선소에 새로운 일감을 제공할 수 있는 원천이 될 것이다.

현재 새정부의 선거당시 공약사항이었던 선박금융공사 설립에 관한 논의가 한창 진행 중이다. 설립의 필요성에 관해서는 정부와 업계가 모두 동의하고 설립 자체는 실질적으로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직까지 형태와 운영방안에 대한 논의는 진행 중이다.

이번 선박금융공사는 기왕에 선박금융의 폭을 확대한다는 차원에서 국내 해운사들의 그린쉽 투자 수요가 반드시 고려돼야 한다. 새로운 공사의 입장에서도 처음부터 무리한 국제금융을 시도하기 보다는 국내 해운사들을 우선 고객으로 확보하고 당면한 금융수요를 제공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국토해양부가 주장하는 ‘기금’ 형태로 국내 민간금융을 선박금융 시장으로 유도하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고 또 다른 형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새정부는 이번 선박금융공사를 단순한 지역금융 정책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해운, 조선시장의 현안과 관련한 제2의 계획조선 정책으로 시각을 확대한다면 보다 현명한 정책이 도출될 것이라 생각된다. 세계 해운시장은 주요 해운국가들에게 어려운 시험을 요구하고 있다. 수년의 침체로 자본의 여력이 없는 상황에서 가능한 많은 고효율선박의 투자 요구가 그 내용이다. 주요 해운국들이 처한 상황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누가 이 시험문제에 현명한 답을 내놓을 것이냐가 관건이다. 시험의 성적은 향후 100년의 그 나라 해운산업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 본고는 필자의 개인적 견해일뿐 필자가 소속된 기관의 공식 입장과는 무관함을 밝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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