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화려했지만, 치열했던 고도 성장기

- 택배시장, TV홈쇼핑 성장 힘입어 폭발적 성장 

- 단가경쟁에서 지면 내일은 없다

[데일리로그 = 오병근 기자] 지난해 국내 택배시장 규모는 총 6조3,300억 원에 달하며, 물량으로는 28억 개에 육박했다. 이는 국민 1인당 연평균 54회를 이용한 결과이고, 시장이 성장세에 있어 이용횟수는 지속적으로 오를 전망이다. 택배가 국민들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서비스가 됐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도성장기를 구가했던 2000년대 택배시장은 어땠을까. 지난 2000년, 우리나라 택배시장 규모는 1억 개도 되지 않는 7,900만 개 수준이었다. 서비스도 지금처럼 빠르고 정확하지 않았다. 택배를 의뢰하면 2~3일은 기본이고, 파손율도 높았다. 하지만, 당시 택배시장은 가파르게 성장했다. 매년 20~30%, 많게는 90% 가까이 성장하는 신종산업으로서 각광을 받았다. 급격히 성장하다보니 당연히 업체 간 경쟁도 치열했다. 한진, 현대로지엠, 대한통운, CJ GLS 등 이른바 ‘빅 4사’간 경쟁은 물론, 이에 도전하는 후발주자까지 합류해 시장에서의 점유율 경쟁은 불을 뿜었다. <편집자 주>

 

“비록 내일은 1위를 내줄지언정 오늘은 즐기고 싶습니다. 다 같이 건배.”

2000년대 중반, 서울 용산의 한 호프집에서는 A사의 택배시장 1위 탈환 자축연이 열렸다. 참석인원은 20여명 정도 됐고, 참석자들은 A사 택배본부장 이하 직원들과 출입기자 10여명. 호텔과 같은 거창한 곳이 아니라 그냥 동네 호프집에서 간단하게 맥주를 마시는 자리였다. 건배사에서도 짐작이 되듯 당시 택배사 간 경쟁은 치열했다. 분기별로 순위가 달라지고 서로 자사가 1위라고 홍보하던 시절이었다. 이 때문에 각 택배사는 자사가 실제로 처리한 물량보다 부풀려 실적을 발표하는 이른바 ‘가짜 물량’이 판을 쳤다. 빅4사 모두 모기업이 있는 그룹 계열사였기에 이들 택배사 CEO는 하나같이 급성장하는 시장에서의 점유율 싸움에서 승리해야만 하는 간절함이 있었다. ‘업계 1위’라는 타이틀을 두고 분기별 연도별로 4사가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경쟁을 주도했다.

- ‘물량전쟁’의 서막은 오르고

2000년대 들어 택배시장은 그야말로 폭풍성장을 이뤘다. 1999년 7,900만 개였던 연간 물량은 2000년 들어 1억1천만 개를 기록, 처음으로 1억 개를 돌파했다. 이후 전년대비 매년 20~30%씩 성장했으며, 특히 2001년도에는 전년 대비 84%나 성장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성장세는 꺾이지 않았고, 2009년 10억 개를 넘어서며 택배시장이 하나의 산업으로 인정받았다.

시장이 급격히 성장하다보니 경쟁은 치열했다. 언론에서는 연일 택배를 비유해 ‘물류산업의 꽃’,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며 치켜세웠다. 전에 없었던 여론의 주목을 받는데다, 하루가 다르게 물량이 늘어나니 택배업계는 활력이 넘쳤다.

하지만, 활력이 넘친 만큼 경쟁도 치열했다. 이 시기, 각 택배사의 화두는 물량 선점이었다. ‘물건을 배달해 주고 얼마를 남기느냐’는 첫 번째 고려사항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량을 가져와야 했기에 덤핑계약이 만연했고, 속을 곪아도 겉으로는 1위 탈환을 부르짖었다.

지금은 택배업계를 떠난 한 인사는 당시 회사 내부 분위기를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회의에 들어가면 경쟁사보다 물량이 뒤쳐진 이유를 물었고,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그 물량을 뺏어올 수 있는지 브리핑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뭐랄까 우리만의 경쟁력이라곤 없었습니다. 택배업체마다 서비스가 다 비슷비슷하다보니, 모든 업체의 유일한 경쟁력은 낮은 단가밖에 없었죠. 그냥 깎고 또 깎아 주는 것밖에 없었죠. 직원 입장에서 볼 때, 그나마 다행인 것은 회사가 수익은 그다지 따지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덕분에 스트레스는 좀 덜했죠.”

택배업계가 물량을 선점하기 위해 내세운 카드는 첫째도 둘째도 ‘덤핑’이었다. 이 때문에 시장에는 ‘덤핑제일주의’가 만연했고, 원인을 두고서는 서로가 서로를 탓하는 촌극이 빚어졌다. 그런 가운데, 가장 눈총을 받았던 택배사는 현대로지엠과 CJ GLS 였다. 이들 두 회사는 상대적으로 후발주자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한진(한진택배), 대한통운(대한통운택배), 현대로지엠(현대택배), CJ GLS(CJ 택배) 등 빅4사 중 가장 먼저 가격인하 전략을 들고 나온 업체는 현대로지엠이었다. 한진(1992년)과 대한통운(1993년)에 이어 1994년 세 번째로 택배시장에 발을 들인 현대로지엠은은 시장 진입과 동시에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쳤다. 경쟁사에 비해 출발이 조금 늦었던 현대로지엠은 공격적인 영업을 단행, 1999년 매출액 기준 기장점유율 1위를 기록했으며, 이후 9년간 이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한진과 대한통운 직원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했다.

“정말 해도 너무합니다. 어떻게 이런 가격을 써내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건 뭐 다 같이 죽자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한 두 회사도 돌아서서는 덤핑대열에 합류했다. 정도가 조금 약했을 뿐이지 입찰만 들어가면 덤핑대전이 펼쳐졌다. 현대로지엠만 덤핑을 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진과 대한통운도, 1999년 가장 늦게 시장에 뛰어든 CJ GLS도 덤핑을 무기로 삼은 것은 같았다. 하지만, 현대로지엠을 꺾기에는 뒷심이 부족했다. ‘덤핑은 현대로지엠이 원조’라는 인식은 이 당시에 생겨난 것이다.

가격덤핑은 결과적으로 시장진입이 상대적으로 늦었던 현대가 국내택배업계 1위로 성장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는 외형적인 것에 불과했다. 현대는 가격덤핑으로 매년 물량은 증가하고 있는데 반해 매출성장세는 더뎌 상당한 내부진통을 겪었다. 현대만이 가격덤핑을 일삼은 것은 아니었지만, 유독 현대에만 따가운 시선이 쏟아지고 있는 것에 대해 학계의 한 연구원은 이렇게 말했었다.

“현대가 업계에서 미움을 사고 있는 것은 가격덤핑에 관한한 ‘원조’라는 인식이 업계종사자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돼 있고, 그 정도 또한 심하기 때문입니다.”

와중에 조금 재미있었던 부분은 대한통운과 한진이다.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에서도 이 두 회사는 공식적이나 비공식적으로 서로를 시기하지 않고 오히려 감쌌다는 점이다. 아마도 수십 년 간 업력이 쌓인 ‘정통 물류기업’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기에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현재는 이 또한 옛날이야기일 뿐이다.

빅4사의 과당경쟁에 따른 단가하락 현상은 각 업체의 목을 스스로 졸랐다. 2003년 당시 업계가 생각하는 적정 단가는 1개당 개인택배는 최소 5,000원이고, 기업택배는 3,500원. 그러나 실제로는 개인택배는 4,000원, 기업택배는 2,000원에도 거래가 이뤄졌었다. 이 같은 택배단가 하락은 매출은 높지만 이익이 나지 않는 경영구조의 원흉이 됐다.

- 불난 집에 기름 부은 우정사업본부

단가전쟁에는 국영기업인 우정사업본부(우체국)도 한 몫 했다. 2001년 6월 우정사업본부가 택배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가격덤핑을 일삼고, 심지어 공익근무요원까지 택배업무에 투입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후발주자이자 국영기업인 우정사업본부는 택배사업을 추진하면서 개인택배도 개당 평균 2,000원∼2,500원을 수수해 업계에 충격을 안겼다. 당시 민간기업의 개인택배 단가는 5,500원이었다. 반도 안 되는 가격에 서비스를 제공한 것이다. 또 본부의 할당제 실시로 각 우체국 소속 공무원들은 인사고과에서 좋은 평점을 얻기 위해 개인차량을 동원해 택배물량을 배송하기도 했다. 물류센터에는 공익근무요원이 투입돼 물품 분류작업을 도왔다. 그러다보니 업계는 “정부기관이 앞장서 시장을 뒤흔들고 있다”는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우정사업본부측은 “배송기간이 3∼4일 걸리는 등기소포가 2,500원인데, 최근 시스템이 좋아져 송달속도가 빨라졌다. 업계에서 이 같은 부문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고 황당한 해명을 내놓았다. 다시 말해 업계가 등기서비스를 택배서비스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재미있었던 점은 당시 우정본부는 공식적으로 ‘택배’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정사업본부 내부적으로는 ‘등기소포’가 곧 ‘택배’였던 것이다.

국영기업인 우정사업본부의 택배시장 정착은 험난했다. 단가를 내려 물량을 확보하니, 폭증하는 물량에 업무량이 과부하가 걸린 집배원이 과로로 사망하는 사고가 연이어 발생했다.

“우정사업본부의 운영체제는 군대와 흡사합니다. 물량 확보량과 일자를 정해주고 하라면 해야 하며, 우체국택배가 집배원 과로사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하루 16시간, 한 달 150시간에 이르는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집배원의 처절한 노동 상황이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입니다.” 전국체신노조 간부의 말이다.

실제로 지난 97년말 45억8,000만 통이었던 우편물량은 2002년 64억2,000만 통으로 급증했음에도 불구, 인력은 1만3,404명에서 1만4,544명으로 제자리걸음이었다.

- 춘추전국시대 ‘활짝’…대기업 앞 다퉈 시장 진출

1990년대에는 한진, 대한통운, 현대로지엠, CJ GLS 등 4사가 경쟁하는 체제였지만, 돈이 될거라고 생각하는 대기업들이 앞 다퉈 시장에 진출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삼성물산(HTH), 우정사업본부(우체국택배), 중앙일보(훼미리택배), 신세계(쎄덱스택배), 아주(아주택배), 유진(로젠택배), 동부(동부익스프레스택배), 동원(동원로엑스택배) 등 대기업이 차례로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이중에는 기존 기업을 인수하는 경우도 있었고, 새롭게 조직을 만든 기업도 있었다. 이 같이 대기업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시장에 진출하며 단가전쟁은 더욱 악화됐다. 후발주자의 유일한 무기는 단가인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후반 4,500원 대였던 택배단가는 2005년 택배업계가 마지노선이라고 했던 3,000원 선이 무너지며 2,961원으로 추락했다.

당시 대한통운 관계자는 “서로 죽자는 거지 뭐. 누가 죽는지 해 봐야지. 단가가 2,000원 대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 어찌됐든 피 터지게 싸우다보면 시장이 정리가 될 것이고 그러면 결국 3~4개 기업만 살아남을 것이다”고 말했다. 2001년 3,190원으로 시작한 단가는 2002년(3,265원)과 2003년(3,280원) 잠깐 반등했지만, 이후 2004년부터 떨어지기 시작해 2010년 2,505원까지 폭락했다.

- 물량 폭증 이끈 TV홈쇼핑시장

이 시기 TV홈쇼핑의 등장은 택배시장의 성장세를 주도했다. 물량을 대량으로 쏟아내는 TV홈쇼핑 시장은 1998년부터 2000년까지 3년간 연평균 87%의 성장률을 구가했으며, 이후에도 택배업체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TV홈쇼핑시장의 성장세가 시들해지자 이번에는 온라인쇼핑몰시장이 급성장을 이루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TV홈쇼핑의 전담택배사로 선정되려는 택배업체간 경쟁이 치열했다. 일례로 지난 2001년 6월 있었던 우리홈쇼핑 전담택배사 선정 관련입찰에는 대한통운, 한진, 현대로지엠, CJ GLS 등 빅4사를 비롯한 10여개 택배업체가 제안서를 내고 경쟁했다. 당시 업계 관계자는 “택배업체들이 홈쇼핑에서 발생하는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인 마케팅을 하고 있다”며, “홈쇼핑업체와 제휴 시 대규모 물량 확보는 물론 부수적 시너지효과도 커 택배업체들이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전했었다. 당시 2001년 10월부터 본방송에 들어간 우리홈쇼핑은 2003년 연간 580만개의 물량이 나올 것으로 예상됐으며, 이는 당시 1위 다툼을 벌였던 대한통운 연간 물동량의 10% 수준이었다.

2003년 택배업체와 홈쇼핑업체간 제휴는 ▲대한통운-농수산홈쇼핑 ▲현대로지엠-현대홈쇼핑·우리홈쇼핑 ▲CJ GLS-CJ홈쇼핑 ▲한진-LG홈쇼핑 등이 짝을 이뤘었다. 당시 대한통운을 제외한 3사의 홈쇼핑 물량에 대한 의존도는 전체 물량의 40%에 달할 만큼 절대적이었다.

- 출혈경쟁 악화…일부 품목 택배단가 1,000원대로 폭락

200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단가경쟁은 더욱 치열해 졌다. 2005년 각 택배사들은 CD나 책 등 부피가 작은 물량은 단가를 1900원대로 내리는 등 극도의 출혈경쟁을 벌였다.

한진의 경우, 기업물량은 3,000원대를 유지하고 서비스 질을 높여 2,000원대까지 가격을 내린 경쟁사와의 차별화를 시도해 왔지만, 서비스는 차별화 되지 않고 단가만 높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로 인해 한진은 2004년 말부터 4위 업체였던 CJ GLS에 월 물량 실적이 뒤쳐졌다. 특히 자사 전체 택배물량의 20%를 차지하고 있는 LG홈쇼핑과의 재계약에 빨간불이 켜졌고, 결국 기존 단가(3,000원) 보다 500원 낮은 2,500원으로 계약을 연장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버텼던 한진도 2005년을 기점으로 저단가 전략으로 전환해 중소택배사인 네덱스와 제휴를 맺고 이 회사가 배송하는 인터넷쇼핑몰 물량(책·CD 등 소형물량) 중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으로의 배송을 1,400원에 체결했다. 이 물량은 CJ GLS와 일본 사가와규빈의 합작법인인 사가와익스프레스코리아가 배송했던 것으로, 사실상 한진이 CJ GLS에 전면전을 선포한 셈이 됐다.

1999년 시장에 뛰어든 CJ GLS는 빅3사를 따라잡기 위해 필연적으로 저단가 전략을 추진해 왔고, 특히 한진의 물량을 집중적으로 공략해 2004년 하반기 업계 3위로 올라섰었다. 때문에 한진은 CJ GLS가 시장점유율 측면에서 자사를 위협하고 있는 업체로 급격히 성장했다고 판단했다. 당시 업계 관계자는 “한진이 최근 물량확보에서 CJ에 밀리는 현상이 빚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위기의식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며, “현 시점에서 한진의 선택은 단가인하를 통한 물량확보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 역시 “한진이 CJ를 타겟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업계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며, “호남지역을 필두로 지방의 경우 한진과의 단가인하를 통한 물량확보 경쟁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고 전했다. 이러한 전략은 유효했다. 한진은 대한통운과 CJ GLS를 제치고 2005년말 2위로 올라섰다.

- 업체 간 물량 부풀리기 현상 만연

2000년대 중반, 단가경쟁이 극에 달해 언론의 관심이 높아지자 각 업체는 물동량을 부풀려 발표했다. A사가 5000만개를 처리했다고 하면, 몇일 후 B사는 5,100만개를 처리했다는 식이었다. 이 때문에 극히 소수의 관계자만 알고 있는 ‘실제 물량’이라는 문건이 생겨났다. 각사 택배영업라인에서 작성한 이 ‘실제 물량’을 분석해 보면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각사 공히 최소 10~20% 이상 물량을 부풀려 발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일부 업체에서는 이 문건을 구하려고 발을 동동 굴렸던 웃지 못 할 에피소드도 있었다.

“회사에서 회의를 하고 있는데, 분명 우리가 더 많은 물량을 처리했는데, B사에서 우리보다 더 많은 물량을 처리했다고 언론에 발표를 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임원이 회의자료를 던지고 난리가 났었습니다. 회의를 하다말고 아는 기자에게 ‘실제 물량’이 담긴 문건을 확보했으면, 지금 좀 보내달라고 요청을 했었습니다. 해당 문건을 갖고 보고를 하니 그제서야 화가 풀리셨는지 ‘우리도 B사에서 발표한 자료보다 더 높은 수치를 만들어 발표를 하라’로 지시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택배업체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 관계자의 말이다.

2006년 12월에는 현대로지엠과 대한통운이 치열한 설전을 벌였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12월 18일 대한통운이 11월 한 달 동안 925만 박스의 택배물량을 처리해 업계 1위를 탈환했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이에 현대로지엠이 “전형적인 물량 뻥튀기”라며 발끈했다. 현대로지엠 관계자는 “10월 한 달간 대한통운의 물량이 712만개였는데 어떻게 한 달 만에 213만개나 늘어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며 “정확한 전산자료를 등을 통해 그 근거를 내놓아야 할 것”이라고 대한통운측을 압박했다. 경쟁업체의 이러한 주문에 대한통운 관계자는 “네트워크마케팅시장에서 제이유가 문제를 일으키면서 우리와 거래하고 있는 암웨이 물량이 20만박스 정도 증가하는 등 물량이 대폭 증가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라며, “경쟁업체의 실적이 높게 나왔다고 아무런 근거 없이 ‘뻥튀기’라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맞받았다. 수년간 ‘업계 1위’라는 타이틀을 놓치지 않았었던 현대로지엠의 물량이 점차 떨어져 2위권이었던 대한통운 및 한진과 엎치락뒤치락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한통운의 이 같은 발표에 격하게 반응한 것이다. 지금은 택배시장에서 CJ대한통운의 독주로 ‘업계 1위’라는 타이틀 경쟁이 사라졌지만, 2000년대에는 십 수 년 간 오로지 ‘업계 1위’ 쟁탈을 위해 끊임없이 치고받았다. 이러한 업계 1위 쟁탈전은 2012년 4위였던 CJ GLS의 모기업인 CJ그룹이 근소한 차이로 1위를 지켰던 대한통운을 인수하고 CJ GLS와 통합하면서 막을 내렸다.

 

- 대접받던 영업소는 ‘미운오리’로

각사 간 경쟁이 과열되다보니 물량 빼오기에 이어 영업소 빼오기도 극성을 부렸다. 배송직원이 없으면 물량이 아무리 많아도 배송을 할 수 없으니, 배송직원을 많이 두고 있는 영업소의 파워는 대단했다. 일례로 2006년 11월 1일 신세계그룹의 물류자회사인 신세계드림익스프레스(이하 쎄덱스)가 택배시장에 진출했다. 당시 CJ GLS의 영업소가 대거 쎄덱스로 간판을 바꿔달면서 한바탕 난리가 났다. 택배업체 입장에서는 영업소는 곧 경쟁력이기 때문에 영업소 지키기에 사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생겨난 것이 영업소 지원금이다. 명목 상으로는 어려운 영업소를 지원하는 비용이었지만, 실제로는 경쟁사로 옮기지 않는 조건이 담긴 일종의 보상금이라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지원금은 배송직원이 대접받던 시절, ‘갑(본사)’과 ‘을(영업소)’의 위치가 뒤바뀐 것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었다.

‘지원금’은 대기업 보다 자금력이 떨어지는 중소기업에 훨씬 더 아프게 다가왔다. 지원금을 주지 않으면 영업소가 다른 경쟁사로 옮긴다고 하니 영업을 계속 하려면 어쩔 수 없이 줘야 했다. 중소택배사들은 단가폭락에 울고, 지원금에 통곡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지원금으로 회사가 문을 닫는 사례도 있었다. 영업손실로 어려움을 겪는 중소기업의 이면에는 이 지원금에 대한 고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 사업을 정리한 KG도 지원금이 영업손실에 커다란 영향을 줘서 결국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일부 영업소 소장들은 지원금에 따라 택배업체를 옮겨 다니며 큰 돈을 벌었다. 시장에서 10여개 업체가 경쟁하던 춘추전국시대에 귀한 대접을 받던 영업소도 후발주자들이 차례로 문을 닫으면서 ‘미운 오리새끼’ 신세로 전락했다. 2008년 당시 한 영업소 관계자는 “작년만 해도 서로 오라고 했는데, 이제는 갈 데가 없다”며 “어떻게 몇 개월 만에 이렇게 바뀔 수 있는지 답답한 마음 뿐”이라고 하소연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지원금은 이제는 거의 사라지고, 최근에는 본사가 영업소의 수수료를 일부분 올려주는 형태로 바뀌었다.

- 단가경쟁에서 패한 후발주자들 줄줄이 몰락

치열했던 단가경쟁은 결국 대기업도 무너뜨렸다. 그룹의 든든한 자금줄을 등에 업고 호기롭게 택배시장에 진출한 후발 택배업체들이 연이어 도산하거나 인수 당하는 수모를 겪은 것이다. 2007년 KT로지스와 아주택배를 인수하며 화려하게 등장했던 동원택배는 이듬해인 2008년 사업을 정리했다. 동원택배는 매물로서도 매력이 없었는지 아무도 매입하지 않았다. 유통최강자 신세계의 물류자회사인 신세계드림익스프레스는 한진에 인수됐다. ‘단가 폭락’과 ‘본사와 영업소 간 대립’은 대기업도 두 손 들게 만들었다.

팔겠다고 내놓기만 하면 최고의 ‘인기상품’이었던 택배업체가 2006년 KG케미컬이 옐로우캡을 인수한 것을 끝으로 매력을 잃었다. KG는 옐로우캡에 이어 동부익스프레스택배와 KGB택배 등을 차례로 인수했지만, 물량경쟁에서 버티지 못하고 경영악화가 지속돼 2017년 말 문을 닫았다. 당시에도 KG를 인수하려는 기업은 아무도 없었다.

후발주자와의 경쟁에서 완승을 거둔 2000년대 말, 빅4사도 충격이 없진 않았다. 도전자들은 물리쳤지만, 빅4사의 시장점유율은 그대로 였고 채산성만 악화되는 등 적잖은 타격을 입었다. 국내 택배시장이 형성된 후 10년간 가장 치열하게 경쟁이 펼쳐졌던 2000년대는 이렇게 기울었다.

2001년 물동량 2억 개 매출액 6,500억 원이었던 택배시장은 2019년 물동량 25억4,300만개, 매출액 5조6,673억 원을 기록하는 9배 가까이 규모가 커졌다. 하지만, 시장의 고민거리인 평균단가는 2,229원으로 2001년(3,190원)에 비해 961원 폭락했다.

택배업계는 단가 인상을 외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아 보인다. 지난해 7년 만에 1.8% 단가가 올랐지만, 그리 오래가진 못할 듯하다. 택배업체가 규모의 경제를 이루려면 외연확대가 필수적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터미널 대형화로 이어지는데, 터미널을 물량으로 채우려면 단가경쟁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2020년 현재, 택배시장에서의 ‘단가 전쟁’은 또 다른 시작을 예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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