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해운집약정책, 전문가 주도 심의委서 결정

- 韓해운산업 합리화, 은행 구제 위한 금융당국 주도
- 63개 선사 2년만에 20개로 정리

[데일리로그 = 김수란 기자] 일반적으로 해운은 짧은 호황, 긴 불황을 겪는 업종이라고 이야기한다. 호황과 불황을 오가면서 얻는 노하우를 통해 선사를 경영하는 것이다. 해운업체 사이에서도 ‘지금은 어렵지만 시황이 뜨면 한방이다’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내 해운산업이 발전하면서 지금까지 크게 3번의 불황을 겪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해운산업 합리화 계획을 이끌어 냈던 오일쇼크, 두 번째는 IMF, 세 번째는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발발된 금융위기다. 이 세가지는 ‘금융 이벤트’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해운업 특성이 자본집약적이고 국제금융과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국제 금융 통화인 달러로 거래하고 달러로 배를 짓기 때문에 금융 이벤트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이다. 최근 금융위기 이후 해운시황이 회복되지 못하면서 업계가 지속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과거와 달리 조선기술의 발달로 불황과 호황의 사이클이 길어진 탓도 있지만, 위기를 해결해 줄만한 정책이 부재했던 탓도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한 해운 전문가는 “위기는 반복되는데 정책을 해야 할 해양수산부가 일이 터지면 대책이나 내놓고 있으니 제대로 되겠냐”고 반문하고는, “해운위기는 원래 계속 반복되는 것인데 해수부가 설립된 후 한 차례 위기를 겪었는데도 뚜렷한 정책이 없으니 업계가 이 정도 버티는 것도 대단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본지는 반복되는 해운위기를 타계하기 위해 과거 일본과 우리나라에서 각각 진행했던 해운산업 합리화 정책을 비교해보고 위기 극복 방안을 모색해 봤다. <편집자 주>

▲ 1979년 북미서안항로 취항 첫 배인 한진서울호. 하지만 오일쇼크 여파로 해운불황을 겪자 해운산업합리화를 하게 된다.

-日해운집약정책, 수에즈 운하 폐쇄가 시초

우리보다 약 20년 앞섰던 일본의 해운산업 합리화(해운집약정책)는 1950년대 수에즈운하 폐쇄와 재개를 겪으면서 선복량 과잉에서 비롯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수에즈 운하는 국유화 및 수에즈전쟁 등으로 폐쇄되면서 선박들이 희망봉을 돌아가는 텀이 발생해 해상운임이 15배까지 급증했다.

일본해운 전문가로 통하는 한종길 성결대학교 교수가 1997년 일본에서 발표한 ‘해운정책과 국제경쟁력’이라는 논문에 따르면, 선사들은 운하가 폐쇄되면서 부족한 선박들을 조선소에 대거 발주했고 이에 따라, 일본 조선소들도 호황을 이뤘다고 한다. 하지만, 수에즈운하가 다시 개방되자 항로는 단축되고 선박은 계속 건조되면서 선복과잉을 불러일으켰던 것.

한 교수는 “그리스 선주들이 극동시장에 진출을 많이 했고 선박도 대형화가 이뤄지면서 여러 상황들이 겹쳤다”며, “결국 선주들의 선복과잉으로 일본 조선소가 바로 타격을 받게 됐다”고 설명했다.

일본 정부는 연이은 조선·해운산업의 도산이 국가 경제에 미칠 심각성을 깨닫고 전반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장기 플랜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일본 정부는 조선업이 노동집약적산업으로 대거 실업문제가 발생할 우려 때문에 조선업을 살리려면 해운을 살려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며, “따라서 대량 실업을 해결하고 양대 산업을 살리기 위해 국민소득 자체를 2배 증가하는 배정(倍增)계획을 세우고 해운산업이 경제 고도성장에 기여하는 직접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정책 플랜을 짰다”고 전했다.

이어 “해운을 먹여 살릴 종합상사(화주)와 자금줄인 금융과 이를 연계한 조선 및 노조 등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며, “이미 2차 세계대전과 재벌해체를 경험하면서 얻은 노하우로 1950년대부터 해당 산업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한 상설기관인 ‘해운조선 합리화 심의위원회’를 통해 지속 논의를 해왔던 탓에 산업 전체의 판을 다시 짰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日 심의위 주도 합리화 진행

일본의 해운조선 합리화 심의위원회는 민간 대학교수를 위원장으로 해운, 조선, 금융, 정부부처, 종합상사, 선원노조 등 대표자들로 구성돼 있었다고 한다. 이 심의위에서 구조조정을 주도하면서 12개 선사가 6개로 합병하고 민간금융기관들과 연결된(계열사) 종합상사, 조선소 등을 포함시키는 통합정책을 펼쳤다.

▲  일본의 NYK를 예로 들면 계열사인 신일본제철과 토요타에서 자사 물량을 NYK에 장기운송계약을 체결하고 NYK는 이 운송을 위해 미쯔비시조선소에 선박을 발주한다. 선사인 NYK는 국책은행에 자금지원요청을 하면 국책은행은 다시 NYK계열사인 미쯔비시은행에 운영자금을 빌려주고 미쯔비시은행은 선사와 선주에 선박금융을 제공한다. 단, 부채비율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선박소유는 중소선사에게 맡기고 NYK는 운항만 담당하게 되는 구조이다.

합리화방안에 따라, 니혼유센(NYK)과 미쯔비시, 신일본제철이 한 그룹으로 통합되고 오사카센파쿠쇼센미츠이(MOL)과 스미토모, 제일중앙기선 계열인 금속이, K라인(가와사키기센)은 이이노기센과 합병했다. 야마시타신니혼기센는 YSL과 병합됐으며 그 외에 재팬라인, 쇼와카이운 등으로 정리됐다.

이들 기업들 중 재팬라인과 야마시타신니혼은 1980년대말에 1990년말에는 쇼와카이운까지 NYK에서 흡수했다. 3~4년전 위기를 겪고 파산절차를 밟은 산코기센의 경우 합리화에 참여하지 않아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한 교수는 “일본 정부는 이들 참여기업에게 재정지출에 따른 이자를 유예해주고 2% 이상 이자에 대해서 정부가 납부해줬으며 재정확보를 위해 장기물량을 매칭시켜주고 비경제적인 선박(부실선박)에 대해서는 손해를 보더라도 매각했다”며 “당시 매각한 선박들 대부분이 우리나라에 유입되면서 1980년대 해운위기때 국내 업계에 영향을 미쳤다”고 전했다.

- 韓 금융당국 주도 해운산업 합리화 추진

1983년부터 진행됐던 우리나라 해운산업합리화는 일본이 진행했던 정책을 일부 벤치마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해운 위기는 1972년과 1979년 두차례 연이은 오일쇼크로 인해 비롯됐다.

이번 위기 초래 역시 오일산유국인 중동 국가들이 오일에 대해 생산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면서 전세계적으로 선박이 지속적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선복과잉을 초래했던 것이 신호탄이었다.

선복과잉으로 인해 국내 해운업체들이 줄도산하면서 가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곳은 은행들이었다고 한다. 당시 은행들은 지금과 같이 담당자 결제가 퇴직이후까지 따라다니는 책임제가 아니라 그 당시 은행 담당자가 책임지는 구조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해운합리화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한 해운원로는 “해운사가 연이어 도산하면서 갚을 빚은 남았는데 배값은 대출금보다 훨씬 떨어져서 어디다 팔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면서 시기 잘못만난 은행 담당자들이 이를 책임지게된 것”이라며, “당시는 지금처럼 퇴직까지 담당자 결제 싸인이 따라다니지 않았던 탓에 이미 대출 결제해줬던 직원은 다른 부서로 이동해 새로운 담당자로 바뀌었는데 이 담당자가 책임을 지는 상황이 되니 은행에서 난처한 입장에 처한 것”이라고 회상했다.

이처럼 해운업체들의 줄도산으로 은행들이 타격을 입게 되자, 은행들은 상위 정부부처인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에 사정을 읍소하게 됐다. 재경부는 이같이 해운업체들의 줄도산으로 거액의 빚을 떠안은 은행들을 구제해주기 위해 1983년 63개의 선사를 17개 그룹선사로 집약하는 해운산업 합리화 계획을 내놨다.

 ▲ 정부부처간 해운합리화 대책 회의.

-1985년까지 최종 20개 그룹으로 정리

고 오세영 동덕여자대학교 교수가 발표한 논문인 ‘해운산업합리화정책과 그 성과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정부는 원양항로에 고려해운, 대양선박, 대한해운, 대한선주, 두양상선, 범양상선, 조양상선, 현대상선 등 8개 그룹에 통폐합했다. 또 동남아항로에 동남아해운, 세양선박, 오성해운, 조양근해상선 등 4개 그룹으로, 한일한로에는 남일상선, 동진해운, 신라해운, 한일해운 등 4개 그룹으로 정리했다. 특수선그룹에는 한국특수선(현 KSS해운)으로 1곳으로 통합키로 했다<표 참조>.

오 교수는 “이중 고려해운, 대양상선, 대한선주, 대한해운, 범양상선, 세양선박 등 6개 그룹이 합병선사이고 나머지 11개 그룹은 운영선사 그룹이다”며, “당초 주력선사로 지정됐던 8개사는 고려해운이 원양 컨테이너 운항권을 현대상선에 이양하고 대양상선도 범양상선에 흡수 합병되면서 6개사로 축소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여러 반복되는 진통 끝에 1985년 한일간 운영선사는 당초 4개 그룹에서 천경해운, 삼정해운, 안진해운, 우양상선, 부산상선, 금양상선, 태영상선, 창덕해운, 동화한진해운 등 9개 그룹으로 확대됐다”며, “2년간에 걸친 계획의 골격은 결국 20개 그룹선사로 마무리됐다”고 덧붙였다.

 

구분

그룹명
(대표)
자본금
(억원)
참여선사
계열사
원양
범양상선
(박건석)
380
범양, 세방해운, 삼익상선, 보운, 대양선박(대우그룹), 세방기업, 삼미해운, 삼미, 대한해운
보양선박
대한선주
(윤석민)
141
대한선주, 선주상선
한림해운
대한해운
(이맹기)
79
대한해운, 코리아상선, 대한통운해운
성운물산, 중앙상선, 범주해운, 유공해운
조양상선
(박남규)
100
조양, 진흥, 남성
서진해운
현대상선
(정몽헌)
886
현대상선, 고려, 한라, 한바다, 신한, 동서
선일상선, 삼원선박
두양상선
(조상욱)
15
동해상선, 세양, 협성선박, 아진, 쌍용, 동호선박, 벨라인, 삼원, 태영상선, 한림, 한양, 남성, 해영상운, 현대해운
 
동남아
세양선박
(추헌출)
68
세양상선, 협성선박, 동성
 
동남아해운
(양재원)
2
동서, 동화, 대한선주
 
오성해운
(윤영식)
2
대보, 용신, 반도목재, 국제상선, 동양종합
 
조양근해상선
(박효원)
5
조양, 진흥, 신한
 
특수선
한국특수선
(박종규)
3
한국케미칼, 미원통상, 일우해운
 
한일
천경해운
(김윤석)
32
천경, 고려, 천경선박, 용인, 창성선박
 
삼정해운
(이태갑)
2
삼정, 선일, 화진, 남홍, 조양
 
안진해운
(김청수)
29
안진, 동남, 대경, 범진, 우경, 영주
 
우양상선
(박수정)
2
정금, 대일, 대방, 신한, 대동
 
부산상선
(김복규)
2
부산, 은성, 남진, 연합, 대방, 선일, 남도, 신광
 
금양상선
(우방우)
2
금양, 극동, 유남, 남성, 대일, 우경
 
태영상선
(박정순)
10
태영, 유남, 남성산업, 남성상선
 
창덕해운
(김영진)
2
창덕, 태우, 신창, 서진해운
 
동진상선
(이양희)
2
동화, 한진상운, 부산해운, 진영해운, 광성해운사
 

 

한국선주협회 50년사에 따르면, 해운산업합리화계획은 1983년 12월 29일 확정하고 총 66개 선사 중 외국합작사가 동의하지 않아 불참한 동영해운, 한진해운, 호남탱커(현 GS칼텍스) 등 3곳을 제외한 63개 선사 중 17개에서 1985년 20개사로 정리했다. 당시 신고된 채무액은 2조 5,163억 원으로, 채권 및 자산액은 2조 7,972억 원으로 집계됐다.

50년사에는 “정부는 합리화 참여선사에게 등록세, 취득세 등 약 677억 원의 조세감면혜택과 연간 약 3,700억 원 규모의 선가원리금상환액을 유예해 자금난을 해소할 수 있게 했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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